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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노 메모리, 노 프로블럼?

백현충 편집2팀장
"내가 누구라고? 도리! 도리?"

애니메이션 ‘도리를 찾아서’에서 주인공 물고기 ‘도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자신의 이름조차 종종 잊을 정도다. 그런 그가 부모를 찾는 모험에 나선다. 도중에 거대하고 무서운 상대를 만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금방 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친구인 문어가 부러운 듯 중얼거린다. "노 메모리, 노 프로블럼(기억하지 못하면 문제가 될 것도 없지). 너는 정말 좋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의혹
잇단 증언에도 하나같이 모르쇠
포도넝쿨처럼 휘감긴 거짓말들
실체 규명만이 성난 민심 달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까먹는 도리의 모험담 같은 일이 ‘최순실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요즘 우리나라에서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고 있다.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한다. 새로운 의혹이 연일 제기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지만 이들의 기억력은 거짓말처럼 형편없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오랫동안 모신 청와대 비서관들부터 그렇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불법 모금을 도운 지적에 대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돈을 내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고,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장관 후보 명단을 넘긴 문자 메시지 흔적에도 불구하고 "그 전화기를 사용한 지 오래됐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최순실은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셀카 사진까지 들어 있는 태블릿PC에 대해 "누구 것인지 모르겠고, 사용할 줄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통령과의 친분을 경쟁하듯 과시하던 여당 내 친박계 인사들도 다르지 않다. 다들 최순실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단다. 발뺌이 상식선을 넘어서자 급기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최순실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다 알았지. 그걸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날을 세워 비판했다.

도리가 방금 일어난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단기 기억상실증’이란 증상 때문이다. 대통령 보좌진과 장차관들이 한꺼번에 도리의 병에 걸렸단 말인가. 기억을 못 해서가 아닐 테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정치적 발언을 통해 무엇인가를 숨기거나 은폐하고 싶은 것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공화국의 위기>에서 대통령 주변 사람들, 특히 보좌관에 대해 "대통령에게 제시될 정보를 걸러내고 외부 세계를 해석해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풀이했다. 그들로 인해 한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어야 할 대통령은 되레 ‘자신의 선택 폭이 미리 결정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심지어 조작의 유일한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베트남 패전 상황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리지 않은 미국 대통령이었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대통령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15.5%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어려운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대통령의 위기는 정권 위기를 넘어 국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책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 버릴 수 있다"라는 말로 인간이 허구를 지어 말하고, 이를 믿는 데 있어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뛰어난 능력이 자신을, 사회를,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성난 민심을 누그러뜨리고 국정을 정상화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거짓이 더 이상 포도넝쿨처럼 나라 전체를 휘감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돕는’ 것이다. 국민은 거짓이 어떻게 누적됐고, 실체를 가린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알 권리가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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